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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천주교 남자세례명
11인 목록
다니엘 남자세례명 목록
- 다니엘 (1월 3일)
- 다니엘 (2월 16일)
- 다니엘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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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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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7월 21일)
- 다니엘 (9월 11일)
- 다니엘 (10월 10일)
- 다니엘 콤보니 (10월 10일)
- 다니엘 (12월 11일)
1. 다니엘
- 세례명 축일
1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8년 파도바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성 다니엘은 유대인 혈통의 부제였다. 그는 그의 사목지인 북동부 이탈리아에서 파도바의 초대주교인 성 프로스도키무스(Prosdocimus, 11월 7일)를 보좌했다. 그는 이러한 노력 때문에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었고, 1064년 1월 3일 장엄하게 파도바의 성 소피아(Sophia)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는 수건과 세례반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남편과 불화 중에 있는 부인들이 전구를 청할 때, 감금 중에 있을 때 그리고 잃어버린 물품을 찾을 때 그에게 전구를 청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다니엘
- 세례명 축일
2월 1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9년 카이사레아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성 엘리야(Elias)와 4명의 동료인 성 예레미야(Jeremias), 성 이사야(Isaias), 성 사무엘(Samuel), 성 다니엘은 모두 이집트 출신의 젊은 그리스도인들로 박해받는 신자들을 방문하고 돌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소아시아의 실리시아(Cilicia) 지방에 있는 광산으로 보내지는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황제(305~311년 재위) 치하 때 형을 마치고 이집트로 돌아가던 길에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레아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두 그 지방의 총독인 피르밀리아누스(Firmilianus) 앞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의 이름을 묻는 총독의 질문에 그들은 부모가 준 이교도의 이름이 아닌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이름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답했다. 그들의 출신지에 관한 질문에도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이란 의미에서 예루살렘이라고 답했다. 그들은 잔인한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모두 끌려 나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집트 출신의 다섯 젊은이가 순교한 뒤에 이미 오래전부터 갇혀있던 성 팜필루스(Pamphilus) 신부와 성 발렌스(Valens) 부제 그리고 얌니아(Jamnia, 오늘날의 야브네 Yavne) 출신의 성 바오로(Paulus)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리고 성 팜필루스의 하인인 성 포르피리우스(Porphyrius)가 총독에게 장례를 지내기 위해 그들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다가 체포되었다.
그 또한 사형 선고를 받고 모진 고문 뒤에 불 속에 던져지는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카파도키아(Cappadocia) 출신의 전직 군인인 성 셀레우쿠스(Seleucus)가 성 포르피리우스의 죽음을 목격했는데, 두렵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신앙을 증거하고 웃는 얼굴로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모습에 크게 감동하였다. 그래서 성 셀레우쿠스도 성 포르피리우스의 용맹한 순교를 칭송하다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지혜롭고 신심 깊은 노인이던 성 테오둘루스(Theodulus)는 피르밀리아누스 총독 집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하인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소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오던 그는 성 엘리야를 비롯해 다섯 명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영웅적 행동에 감탄해서 감옥에 갇힌 그들을 방문하였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던 그는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인들을 도왔다는 혐의로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총독 앞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분노한 총독의 명령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그리고 카파도키아 출신으로 여행을 마치고 막 카이사레아로 돌아온 성 율리아누스(Julianus)는 다섯 순교자의 영웅적 순교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이 순교한 곳으로 가서 그 땅에 입을 맞추고 성인들의 유해를 하나하나 끌어안으며 입을 맞춰 공경의 예를 표하였다. 이를 본 파수꾼들에 의해 그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체포되어 총독 앞으로 끌려갔고, 산 채로 불태우는 화형을 선고받고 순교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카이사레아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쓴 12명 순교자의 시신은 나흘 동안 매장되지 못하고 짐승의 밥으로 버려졌다. 하지만 짐승이나 새가 전혀 순교자의 시신을 건드리지 못하자 결국 수습해서 매장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팜필루스와 성 발렌스와 성 바오로를 6월 1일 목록에, 함께 순교한 다섯 젊은이와 성 포르피리우스와 성 셀레우쿠스는 2월 16일 목록에, 그리고 성 테오둘루스와 성 율리아누스는 2월 17일 목록에 기록해 기념했었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들 12명의 순교자 모두를 2월 16일 목록에 기록하며 그날에 함께 기념하도록 했다. 이들 순교자의 희생으로 카이사레아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다니엘
- 세례명 축일
2월 2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4년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성 다니엘 신부와 성녀 베르다(Verda)는 사푸르 2세 왕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페르시아에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은 동방 교회에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다니엘
- 세례명 축일
3월 3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11년 무라노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성 다니엘은 본래 독일 상인이었는데, 사업상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 부근을 두루 여행하던 중 무라노의 카말돌리 연합회 수도승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지도하에 자신의 집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고, 늘 더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기를 원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기도하던 작은 방에서 강도에 의해 살해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다니엘
- 세례명 축일
4월 2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세기 헤로나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전설에 따르면 은수자 성 다니엘은 소아시아 지방 출신으로 샤를대제(Charlemagne) 시대에 살았다. 그의 순교 상황에 관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에스파냐 헤로나에 있는 베네딕토 수녀회 수도원 성당의 주보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다니엘
- 세례명 축일
7월 1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29년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성 레온티우스(Leontius),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성 다니엘을 포함해서 45명의 아르메니아(Armenian)의 그리스도인들이 리키니우스 황제의 박해 때 니코폴리스(Nicopolis)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대박해의 마지막 순교자들에 속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다니엘
- 세례명 축일
7월 2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에 속한 예언서이다. 히브리어 경전은 다니엘서를 성문서(聖文書)에 포함해 에스테르기와 에즈라기 사이에 배치하고 있으나, 70인역(Septuaginta)이나 그 밖의 그리스어 번역본들은 이를 예언서로 취급하여 에제키엘서 다음에 배열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은 이 순서에 따라 다니엘서를 예언서에 배치하고 있다.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판결하신다’는 뜻으로 아이들이 출생할 때 많이 붙여진 이름이다. 다니엘서의 기록에 의하면, 다니엘은 유다 임금 여호야킴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함께 갔다. 그는 네부카드네자르, 벨사차르, 다리우스, 키루스 임금 치하에서 궁중의 조언자로서, 포로로 끌려 온 자기 민족을 위한 예언자로서 활동했다.
다니엘서를 포함하여 구약성경이 담고 있는 다니엘에 관한 보도들은 일관되지 못하고 역사성도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 시대의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서 형성된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상징적 인물의 기원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듯 다니엘서의 저자가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모르나, 하시드인(Hasidim, ‘경건한 자들’이란 뜻)에 속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본다. 하시드인으로 구성된 유대교 일파가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대략 마카베오 형제들의 항쟁 이전이다. 이들은 율법에 충실했으며, 이방 민족들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이다.
하시드인은 처음에는 마카베오 형제들의 항쟁을 지지했던 것은 사실이나(1마카 2,42; 2마카 14,6), 이 항쟁이 종교성을 상실한 순수 정치적 실력행사로 판단되는 순간 거기에서 이탈하여 그들 고유의 행동노선을 밟아 갔다. 이들의 직접적인 후예가 바로 바리사이들이다.
다니엘서 저자는 그리스화 움직임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으며, 성실하게 사는 유다인으로 하여금 율법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자들도증오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들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동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박해에 직면해서도 굽힐 줄 모르는 신앙을 고취하고 있다.
다니엘서 9,4-19절과 3,26-45절은 하시드인들의 정신을 잘 반영해 주는 기도문들이며, 그 기도문들에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선성(善性)에 호소하고 있다. 사후(死後)의 상선벌악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의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명해 낸 것은 다니엘서 저자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니엘서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다니엘은 어려서부터 바빌론 정부가 자신들의 하수인을 만들기 위해 유다 왕족이나 귀족의 자녀들을 모아 교육할 때 그 대상자로 뽑힌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이름까지 바꾸며 강제로 바빌론 문화를 익혀야 했다.
다니엘과 그의 동료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는 벨트사차르,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라는 이름으로 임금의 시종(侍從)으로 발탁되었고,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정확해 해석해줌으로써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들에게 닥친 첫 시련은 궁중에서 지내면서 율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음식과 술을 강요당한 것이었으나 다니엘은 내시장에게 간청해 슬기롭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1장).
그러나 최대의 시련은 네부카드네자르가 두라 평야에 금으로 만들어 세운 우상에 절을 해야 한다는 임금의 명령이었다. 모두가 이 명령을 따를 때 다니엘의 세 동료는 결코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수 없었다.
그들은 고발당해 임금이 선포한 대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졌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불가마 속에 있는 그들을 구해주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유유히 걸으며 하느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드렸다(3장).
얼마 후 다니엘도 모함을 받아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다리우스 임금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지 말라는 금령을 어기고, 늘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사람들이 다니엘을 모함해 고발하자 법이 정한 대로 사자 굴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다.
임금은 다니엘을 아꼈기에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이 정한 법을 스스로 어길 수는 없었다. 다니엘은 결국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셔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오히려 악의로 그를 고발했던 사람들이 임금의 명으로 사자 굴에 던져지자마자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말았다.
다리우스 임금은 조서를 내려 누구든 하느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하며 그분을 찬미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다니엘은 다리우스의 통치 때와 페르시아의 키루스 통치 때에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6장).
다니엘은 수많은 환시를 통해 미래의 일들을 보았고, 예루살렘의 복구와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게 될 의인들의 결정적 승리와 부활에 대해 선포했다(7-12장) 또 다른 대표적 일화로는 수산나를 구한 일이 있다. 욕정에 눈먼 두 원로가 아름답고 신앙심 깊은 수산나를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수산나의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다니엘을 보내주셨다.
다니엘은 슬기로운 판결로 수산나의 무죄를 밝혀내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을 찬미했고, 죄인들에게는 응당한 벌을 주었다(13장). 이렇게 다니엘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희망을 전한 예언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다니엘
- 세례명 축일
9월 1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84년 뱅거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데이니올.
다니엘 이야기
성 다니엘을 뱅거의 다니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웨일스(Wales) 지방 스노우도니아(Snowdonia) 지역을 가르는 메나이(Menai) 해협 동쪽의 뱅거 파르(Bangor Fawr)에 수도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당시 웨일스의 귀네드(Gwynedd) 왕국에 속한 뱅거 교구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종교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란카판(Llancarfan) 수도원의 성 카독(Cadoc, 1월 24일) 문하에서 공부했다. 616년경 체스터(Chester) 전투 때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에텔프리드(Ethelfrid) 왕에 의해 그가 설립한 뱅거 수도원의 많은 수도승이 살해되었는데, 그 수가 1,200명을 넘었다는 기록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수도원장과 주교로서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다가 584년 선종하여 바드시 섬(Bardsey Island)에 안장되었다. 그 후 그에 대한 공경은 웨일즈 북부 지방에서 널리 퍼졌고, 많은 성당이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는데 뱅거 수도원 자리에 건립된 주교좌성당 또한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다. 그는 웨일스에서 보통 데이니올(Deiniol)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다니엘
- 세례명 축일
10월 1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27년 모로코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1219년에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의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성 베라르두스(Berardus, 1월 16일)와 동료들이 이듬해 모로코에서 순교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들이었고, 그들의 순교는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227년,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다음 해에 토스카나(Toscana)에서 여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를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성 사무엘(Samuel), 성 안젤루스(Angelus), 성 레오(Leo), 성 돔누스(Domnus), 성 니콜라우스(Nicolaus), 성 후골리누스(Hugolinus)였다. 그들은 먼저 에스파냐로 가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칼라브리아(Calabria)의 관구장인 성 다니엘 신부를 만났다.
성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에 도착해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세우타(Ceuta)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해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새우고, 주일 아침에 세우타 시내로 들어가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무함마드(Muhammad)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도시에서 그들의 설교는 곧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결국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모두 미쳤다고 판단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무어인들은 감옥에 갇힌 선교사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 주일, 술탄 앞에 선 그들은 자기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함마드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은 자행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세우타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으로 처형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상인들에 의해 세우타 교외에 묻혔고, 나중에 에스파냐로 옮겨 모셨다. 성 다니엘과 여섯 동료는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3일에 그들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0일로 옮겨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다니엘 콤보니
- 세례명 축일
10월 1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Comboni - 신분과 직업
주교, 설립자,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831-1881년 아프리카
다니엘 콤보니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꼼보니, 다니엘레, 대니얼.
다니엘 콤보니 이야기
1931년 3월 15일 북부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 근처 가르다(Garda) 호숫가의 리모네 산 조반니(Limone San Giovanni)에서 출생한 성 다니엘 콤보니는 농부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여덟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교구 신학교를 다닌 후 베로나(Verona)에 있는 마차(Mazza) 신부의 선교사 양성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를 하겠다는 뜻을 품고 신학 외에도 몇 가지 외국어와 의학을 공부하였다.
1857년 수단 선교를 위한 탐험대와 함께 중앙아프리카로 파견된 그는 나일 강 상류 지방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여건과 적대적인 환경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에 세 명의 신부가 사망하였다. 그래서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은 이 지방의 선교를 포기하고 성 다니엘 신부와 동료들을 이탈리아로 귀환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마차 신부의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64년 ‘아프리카인들을 통해서 아프리카를 구원하자’는 선교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유럽인들이 해안선을 따라 선교지를 구축하고 그곳에서 아프리카인들을 교육시켜 내륙으로 파견하자는 계획이었다.
1867년 그는 교황의 허가를 얻어 베로나 사제회(Verona Fathers)라고도 불리는 콤보니의 예수 성심 선교회를 설립하고, 이집트의 카이로에 아프리카인 남성과 여성을 위한 두 개의 학교를 세웠다. 모금을 위한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1872년에 베로나 수녀회(Verona Sisters)라고도 불리는 니그리지아 신심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 성 콤보니 신부는 수단, 누비아 그리고 큰 호수들의 남쪽 영토들을 포함하며 이집트부터 짐바브웨까지, 그리고 홍해부터 말리까지를 관장하는 중앙아프리카 대목구의 부대목에 임명되었고 1877년에는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선교지 확보와 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헌신하다가 1881년 7월 말라리아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간 계속 일을 하다가 결국 그해 10월 10일 하르툼(Khartoum)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96년 3월 17일에 그를 복자품에 올렸으며, 2003년 10월 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다니엘
- 세례명 축일
12월 1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신분과 직업
신부, 주행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09-493년
다니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다니엘 이야기
유프라테스의 사모사타(Samosata) 근교인 마라타(Maratha) 태생인 성 다니엘은 12살 되던 해에 가까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 원장과 더불어 안티오키아(Antiochia)를 여행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기둥 위에서 고행하고 있는 성 시메온(Simeon, 1월 5일)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 후 성 다니엘은 원장이 서거한 뒤에 원장이 되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성지를 순례하였으며, 그 후 그는 성 시메온 주행자(柱行者)와 같은 고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근교의 한 지점에서 기둥 위에 올라가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에 세운 기둥 위에서 33년 동안 살았는데, 황제 레오 1세는 그를 위해 단을 갖춘 여러 기둥을 건설해 주었고, 그를 서품하기 위해 잠시 내려오라는 요구까지 물리치자 성 겐나디우스(Gennadius)는 기둥 위로 가서 그에게 사제 서품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465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대화재가 발생하리라 예언했으며, 그의 성덕과 치유 은사는 매우 유명하였다.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와서 설교해 주기를 청하면 그는 자신의 기둥 꼭대기에서 설교하여 많은 감명을 주었다.
또한 그는 황제 레오 1세와 제노의 자문관으로도 활약했고, 그리스도단성론(Monophysitism) 이단을 지원한 황제 발리스쿠스를 단죄하고 에우티키아누스(Eutychianus)를 지원하기 위하여 꼭 한 번 그의 기둥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성 다니엘은 기둥 위에서 운명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그 기둥 밑에다 안장하고 공경해 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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