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마리아 데 마티아스, 요안나, 총 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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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남자세례명 니콜라오 스투디테스, 도나토, 라바노 마우로, 렘베르토, 마뇨, 모단, 아벤티노, 아퀼리노, 안드레아 코르시니, 에우티키오, 요셉, 요한 데 브리토, 이시도로, 제미노, 젤라시오, 질베르토, 테오필로, 필레아, 필로로모, 총 19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2월 4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2가지
2월 4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마리아 데 마티아스
- 가톨릭 성인 이름
Maria de Mattia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805-1866년
마리아 데 마티아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스,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데 마티아스 자료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Maria de Mattias)는 1805년 2월 4일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프로시노네(Frosinone) 지방에 위치한 교황령의 최남단 마을인 발레코르사(Vallecorsa)에서 태어나 그날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아버지 조반니 데 마티아스(Giovanni de Mattias)와 어머니 오타비아 데 안젤리스(Ottavia de Angelis)의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매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읽어주는 성경 이야기를 듣고 인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랑을 키워갔다. 비록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여성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신앙의 진리뿐만 아니라 성경의 일화와 인물들에 대해 배우고 내면화시킨 이 모든 일들은 발레코르사와 그 주변 지역이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고통 받던 시기(1810-1825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정신 안에서는 증오와 복수를 야기하는 인간의 피와 사랑과 구원을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피의 존재가 대비되었다.
10대 초반까지 세상과 접촉하지 못하고 집안에 박혀 지내던 그녀는 한때 종교보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기도 했지만, 16-17세에 이르러 인생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고 무한한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내면의 어두움을 걷어내던 그녀는 신비로운 환시를 경험하고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피를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명백해졌다. 또한 이 체험은 마리아가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과 천상 아버지의 감미로운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원천이요 힘이자 동기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피를 어떻게 주셨는지를 알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는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체험이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그녀가 17살이 된 1822년 보혈 선교회를 설립한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1월 2일)가 그녀의 마을을 방문했다. 자기희생의 모범으로써 그리스도의 보혈(보배로운 피)의 신비를 제시한 성인의 설교에 마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마리아는 자신의 가슴 속에 간직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결국 가스파르 성인의 동료 중 하나인 가경자 조반니 메를리니(Giovanni Merlini) 신부의 지도 아래 그녀는 1834년 3월 4일, 그녀의 나이 29살에 프로시오네의 아쿠토(Acuto)라는 작은 마을에서 학교를 시작하며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 원장은 30년을 넘게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여러 곳에 소녀들을 위한 학교와 수녀원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당시 여자 아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가정생활의 성화를 위해 기혼 여성을 위한 강좌를 여는 등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걸어서 여행하는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자신이 가는 곳이면 어느 마을에서든지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구속의 사랑을 이루신 성혈의 신비를 선포하길 원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그녀는 ‘설교하는 여성’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설립한 공동체는 매우 가난했고 종종 먹을 것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항상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과 무엇이든 나누기를 원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가 설립한 수도 공동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이미 70개를 넘어섰다.
그녀는 1866년 8월 20일 로마(Roma)에서 선종하여 로마의 캄포 베라노(Campo Verano)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선종 이후에 더욱 널리 퍼져 30년이 지난 1896년 그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고, 그 열기는 1950년 10월 1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그녀의 시복이 선포되었을 때 최고점에 올랐다. 그 후 그녀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수녀원 총원의 보혈 경당 내로 옮겨 모셨다. 그녀는 2003년 5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의 축일은 예전부터 기념해 오던 2월 4일 또는 선종일인 8월 20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요안나
- 가톨릭 성인 이름
Jan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왕비,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64-1505년 발루아
요안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요안나 자료
발루아의 성녀 요안나(Joanna de Valois)는 1464년 4월 23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당시의 왕인 루이 11세(Louis XI)와 왕비인 사부아(Savoie)의 샤를로트(Charlotto)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육체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고 더욱이 곱사등이에 마마 자국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왕인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매우 냉대하였다.
그러나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오를레앙(Orleans)의 공작인 루이(Louis)와 결혼하기로 정해졌기 때문에 성녀 요안나는 12세가 되던 해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정황에 따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오를레앙의 공작은 그녀를 무시하고 혐오했으나, 이러한 모진 대우들을 그녀는 고결한 성품으로 이겨냈다. 후에 루이 12세로 왕위에 오른 오를레앙의 루이 공작은 자신의 결혼은 루이 11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그의 이런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결국 혼인무효와 함께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베리(Berry)의 공작으로 봉해진 성녀 요안나는 자신의 영지를 왕국 안에서 가장 지혜롭게 운영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병자와 전염병 환자 구호, 주거 시설 복구, 가난한 일꾼들의 급여 인상, 여자 어린이들의 교육,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 모금, 수도원 개혁 등을 계획에 따라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작은 형제회 회원이자 자신의 고해사제였던 가브리엘 마리아(Gabriel Maria, 8월 27일) 신부의 도움으로 신심 깊은 10명의 여성들을 모아 관상 수도원인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1504년에 가브리엘라 마리아(Gabriella Maria)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궁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녀는 남모르는 고행과 여러 번의 신비로운 종교체험을 한 후 1505년 2월 4일 부르주(Bourges)에서 사망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1742년 4월 21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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